서안씨 블로그

이 이야기는 인천시청이 들어선 구월동 

인근에서 똥을 푸던 할아버지 이야기입니다.


사이먼리 토지연구소! 인천에서 거부가 된 똥푸는 할아버지 이야기



똥을 푸는 동자풍(가명)할아버지는 6.25전쟁 때 

부모를 잃고 혈혈단신으로 내려와 온갖 고생을 다했습니다.

구두닦이, 신문배달, 건설 일용직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남의 집 똥을 푸는 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예전부터 동자풍씨의 꿈은 자신 소유의 땅을 

한 평이라도 갖는 것이였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요!. 

자신이 번 돈으로는 농사를 지을 만한 땅 한 

평을 사기도 힘들었습니다. 


결국 농지가 아닌 아무 땅이나 사서 보유라도 

해보자는 목표가 생겼습니다.  

그동안 죽을힘을 다해 벌어둔 얼마간의 

돈을 탈탈 털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인천에서 가장 싼 땅을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그 당시 시청이 동인천에 있었는데 인천으로 보면

서쪽 제일 끄트머리 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동쪽 끝과 북쪽 끝인 땅은 행정구역상 

인천이기는 하지만 인천이라고 볼 수 없는 곳 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자풍씨는 지금의 남동구인 곳의 작은 돌밭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당시 그곳이 인천에서 제일 쌌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천 중심지에서 멀고 땅이 돌로 뒤덮여 있어서

아무 쓸모없는 땅이었습니다. 

땅이 무려 평당 10원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아이들이 먹는 아이스케키가 5원이었으니

정말 싸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동자풍씨의 수입은 한 달 몇 천원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생활비를 아끼고 아껴 그 돌밭은 계속해서 샀습니다.

그러기를 30년. 이제는 제법 큰 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인천이 발전하면서 동쪽으로도 인구 분산이 많이 되었고,

더구나 인천시청이 너무 서쪽 끝에 치우쳐져 있다는 이유 때문에

시민들의 민원도 지속 되었습니다. 


결국 인천시청을 옮기는 계획은 세우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시청 자리로 낙점된 곳이 인천에서 

가장 싼 곳이며 암석이 많아 지반이 튼튼한 현재의 

남동구 지역이 되었습니다.


동자풍씨는 하루아침에 엄청난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고급승용차 트렁크에 곡괭이 등

농기구를 싣고 다니며 남의 밭농사를 짓습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병이 난다며 아들, 며느리가 말리는

데도 굳이 노동을 합니다. 진정한 서민갑부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네요. 


동자풍 할아버지는

점심 지나 오후가 되면 며느리가 고급승용차를 

끌고 참을 주러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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