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씨 블로그

안녕하세요. 로에게 평을🙏 서안씨입니다. 요즘 명상을 하면서 느끼는 "카르마"애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대부분의 명상이 "카르마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매 순간 마음의 소리가 올라오는데, "내가 아니니까" "내가 아님"을 알아차리는 것, 어떨까요? 안 잡을 수가 있어요. "내가 아니구나"라는 걸 보는 것, 그걸 알아차리는 것, 상념이 "내가 아니구나"라는 걸 알아차리고 감정이 "내가 아니구나"라는 걸 알아는 그 순간, 우리 명상은 질이 바뀐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안 잡을 수가 있어요. "안 잡는" 흐름으로 들어갈 수가 있게 돼요.


"안 잡는다" 하여 안 일어날까요? 카르마가 있는데, 내 안에서 계속 일어나게 되죠. 지금부터 생각할 것은 카르마가 대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면 안 잡을 수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카르마에게 내가 정신 안 뺏길 수 있어요. 이제 생각, 감정, 마음의 소리에 "내가 이제 정신을 안 뺏겨 일어나" 하는 순간 나의 마음의 눈이 내면을 향한 거예요. 비로소, "어", 과거에는 어땠나요? 이 모든 생각이나 마음의 소리나 이런 것들을 "나"라고 얘길 때는, 이 마음의 소리에 의해서 밖을 봤었죠.

이걸 "나"라고 여기면, 밖을 보고, 그 마음의 소리를 상대방에게 뿜어내며 나의 관계를 맺어 왔는데, 그게 아니라, 이 마음을 보게 돼요, 이제, "밖을 보는 게 아니라, 이제, 내 마음을 보는 상태가 되죠."

어떻게 보면, 깊은 내면을 향하는 건 아니지만, 내 마음을 보는 눈이 이제 서서히 떠졌다고 할수 있어요.

 


그리고 상대방을 향해,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는 거에요. "내가 이렇게 반응하고 있구나", "내가 이렇게 긴장하고 있구나", "이 상황 속에서 내 마음의 컨트롤이 잘 안 되네" 이렇게 보면서, "내 마음을 보는 상태가 이제 되기 시작해요.

그 마음은 일어나는데, 나의 마음은, 이 상황이 사람을 대하고 있고, 이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일으키는 "까르마"를 봐 버리게 되죠.

그러니까, 어떻게 될까요? 이제, 그다음부터는 까르마를 대상으로, 나의 수행의 흐름이 방향이 바뀌어 버립니다.

카르마를 안 잡아야 되는데, 이 카르마는 '생존의 에너지' 그 자체인 것이죠 그래서 이 카르마의 뇌가 바로 우리에 있어서는 중뇌에 해당합니다. 생명의 뇌라고 하지요. 우리 어떤 습성이나, 그 모든 것들이 이 중뇌에 다 배어 있는 거라고 할 수 있어요.

 


대뇌 피질은 합리적으로 생각을 해요. 그런데 기질, 습성, 성향, 등은 대뇌 피질의 영역의 것이 아니라고 해요. 그 역할은 중뇌가 하는 것이지요,

더 들어가보면 중뇌는 '원시뇌'의 것입니다. 이 원시뇌는 그 습성을 바탕으로 해서, 내 합리적인 생각을 갖다가 전개시킵니다. 아무리 합리적인 생각을 한다고 해도 이 원시뇌의 지배를 받고 있는 거죠. 원시뇌가 뭐냐면, 생명의 뇌라고 합니다. '내 생명을 내려놓는다'. 이 어떤 흐름을 우리가, 수행자로서 기본적으로 갖지 않아는 여기, 지배를 받게 돼 있어요.

 


카르마를 등식으로 표현하자면 카르마 = 에고적 생명으로 표현할 수 있어요. 진짜 생명은 카르마가 있든 없든 상관이 없어요. 카르마도 근원에서 일어나는 생명력을 받지 않으면 카르마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니까요. 카르마가 카르마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깊은 가운데 생명력이 일어나기 때문인데 이것이 일차적으로 카르마를 쓰고 일어나요. 그러다 보니 마음의 뿌리인 카르마를 생명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부분은 생존의 영역이 되기 때문에 누군가 카르마를 건드리면 죽기 살기로 싸우게 되는 상황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카르마를 우리가 어떻게 다스려 나가야 할지 생각해야 하고 카르마를 안 잡고 통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나의 존재성을 안 잡아야 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나의 존재성을 그냥 내려놔 버리는 것, 여기에 연결되는 게 바로 호흡인데 호흡도 같이 내려놓는 거죠. 그래서 이 호흡을 내려놓는다, 어떤 흐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심란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면 가장 원초적인 옳고 그름을 따질 재간이 없을 정도로 죽고 사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거기다 갖다 놔 버리는 거예요. 굉장히 깊은 차원의 명상이 될 수 있겠죠. 그걸 이제 우리는 넘어서야 됩니다. 근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명상을 할 수가 없죠. 왜 그러냐면 일반적으로 죽어야 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죠. 죽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카르마를 넘어야 할 이유를 못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명상은 "카르마를 전제로 한다"인 것입니다. 카르마를 극복한다는 개념이 아닌 카르마를 '사용한다'는 개념이 됩니다.

 


카르마는 일종의 내안의 '잠재능력'인 것입니다. 카르마는 자체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인간이 생명력을 경험하는 요소가 됩니다. 따라서 신구의(身口意) 바로 나의 몸과 정신과 마음, 즉 모든 활동을 말합니다. 생존의 문제에 봉착하면 이후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다른데 집착했던 마음들이 매우 같잖게 보이는 것이 되고 그 정도뿐 아니라 마음 자체가 안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모든 번뇌가 그래서 이 생존의 흐름 속에 놓여 있는데, 이것마저도 내려놓을 때 우리는 차원 변형이 일어납니다. 근데 이걸 시도할 이유가 없어요 그러면 시도할 이유가 언제 시도할까요?

보다 더 깊은 근원을 향한 그리움이 일어날 때만 생존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사고 구조가 형성돼요. 그리하여 생을 내려놓게 됩니다. 생을 내려놓 동시에 어떻게 될까요?. 죽음도 사라지게 돼요. 생이 없으니 죽음이 사라지는 거죠. 그걸 경험하는 거예요. 무슨 말일까요? 마음이 끊어지는 차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걸 우리는 공성이라고 합니다. 공성의 상태가 되면 카르마가 사라집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시다. 바다 위에는 파도가 막 쳐요. 파도가 마구 넘실거려요. 물밖로 머리만 내놔도 막 파도가 때리고 눈에 물 들어가고. 그런데 물속으로 쏙 들어가 버리면 어때요? 파도의 영향을 안 받게 되죠. 더 깊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파도에 영향을 받질 않아요. 파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없지요. 그 안에 어떻게 파도가 존재하나요? 바닷속에는 파도가 존재하지 않아요. 파도는 바다 위에 표면에 존재하는 거예요.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리게 되면 "근원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파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자리는 파도가 존재할 수가 없어요.

그 이치를 알게 됩니다. 근데 이 자리가 바로 근원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무한한 에너지를 경험하게 되고 에너지 속에 무한한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충만함을 경험하게 돼요. 그게 나라는 게 없어요. 그냥 깨어 있는 의식 그 자체인 거죠. 깨어 있는 의식이 곧 나입니다. 그걸 경험하고 있으니까. 그걸 나라고 할 수 있겠죠. 근데 여기는 '개체적 나'가 아니라. '전체적 나'인 것입니다. 어떤 개체성의 나가 아니라 깨어 있는 그 자체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파도 속에 갇혀 있다 보니 파도가 나인 줄 알았는데 바다가 나인 걸 경험하는 거지요. 그 상태가 될 때 우리는 진실한 자유함을 경험할 수 있어요.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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